문화예술 2026 여름호
부산 예술계를 읽다 ①

하워드 베커의 『예술계』를
통해 부산 예술계를 읽다

예술에 대한 신화와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예술은 한 사람의 영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대 위의 예술가뿐 아니라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 공간과 기술을 제공하는 사람, 예술을 알리고 기록하는 사람, 이를 선택하고 평가하는 사람,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사람과 제도·기관, 그리고 작품을 만나는 관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참여자의 협력과 조정 속에서 하나의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문화예술』는 2026년 8월호부터 12월호까지 특별기획 「부산 예술계를 읽다」를 연재한다. 그의 문제의식을 하나의 렌즈로 삼아 부산의 음악·연극·무용을 비롯한 공연예술 현장을 들여다보고, 지역의 예술이 누구에 의해 생산되고 어떤 제도와 자원 속에서 유지되며, 어떠한 선택과 평가의 과정을 거쳐 관객과 만나는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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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신화의 함정

'천재'는 예술에 대한 가장 진부하면서도 강력한 신화다. 세상과 불화하며 홀로 고독하게 고뇌하는 예술가,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예외적이고도 영웅적인 서사, 술과 광기에 둘러싸여 인생과 맞바꾼 작품 등이 이런 신화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이런 순진한 시선으로 예술과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국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S. Becker)가 1982년에 펴낸 이후 예술사회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예술계(Art Worlds)』의 영향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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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혼자 만들지 않는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예술은 천재 예술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협력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집합적 실천(collective practice)"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고상하거나 현학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질문들에 매몰되지 않고 대신 사회학자답게 예술 작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집단적 실천'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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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의 구성원들

베커가 정의하는 '예술계(Art Worlds)'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조직이다. 여기에는 예술가라고 할 때 우선 떠올리는 창작자뿐만 아니라 재료 공급업자, 평론가, 기술자, 유통업자, 관객과 독자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베커에 따르면 예술은 이 모든 이해관계자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자 노동 분업의 현장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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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 없이 예술도 없다

언뜻 관습이라고 하면 예술가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여기기 십상이지만 베커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도 전복한다. 오히려 관습은 공유된 규칙으로서 협력을 원활하게 하고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관습이 없다면 예술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관습을 깨는 예술가도 존재하지만 베커에게 이런 행위는 '낭만적 반항'이라기보다 '경제적 계산'의 결과다.

하워드 베커의 『예술계(Art Worlds)』 — 예술사회학의 고전

예술은 고립된 천재성의 결과가 아니라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협력을 끌어내는
소통과 협업의 역량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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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술을 결정하는가

베커가 특히 날카롭게 파고든 것은 누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구분하는가였다. 베커에 따르면 어떤 것이 예술로 인정받거나 그렇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예술계 구성원들이 협상하고 투쟁하고 합의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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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이 돌아오는 곳

개인적으로 사회학을 공부했고 출판사를 20년 가까이 운영하다 보니 사회학자가 예술계에 대해 쓴 이 책의 여러 이야기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경험 많고 노련한 저자들은 편집자, 디자이너, 번역자 등이 책 한 권을 위해 노심초사한 그 모든 노력이 결국은 저자인 자신의 공으로 돌아올 것임을 잘 알기에 오히려 여러 비판과 제안을 반가워하고 고마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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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사회학으로 본 예술

베커는 자신의 연구를 '예술사회학'이 아닌 '직업사회학'으로 명명했다. 베커의 『예술계』를 읽고 나면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적어도 훨씬 입체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확실하다. 이 책은 주로 관찰의 결과들을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기에 이론적이거나 학술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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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예술계

바야흐로 AI도 예술계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되고 있는 시대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SNS의 독자 커뮤니티 등도 모두 새로운 예술계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그런 분들일수록 더욱 이 책을 읽고 예술에 대한 관점을 크게 환기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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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잃고 세계를 얻다

베커는 예술가에게서 특별함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그 특별함이 어디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추적했을 뿐이다. 베커는 이 책을 통해 저 높은 천상의 자리에서 홀로 헤매고 있던 예술을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영위하는 현실 세계 속 제자리로 데려왔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천재를 잃었지만 훨씬 넓고 풍부한 예술의 진짜 세계를 얻게 되었다.

부산 예술계를 읽다 ② 미리보기

누가 예술을 만드는가 — 남영희 · (재)부산문화회관 공연예술본부장

공연예술에서 '예술을 만드는 사람'이라 하면 보통 누구를 떠올리시나요?

무대에 서는 예술가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데 실제 공연이 올라가기까지를 생각해보면, 기획자·조명 감독·음향 기사·무대 감독, 심지어 티켓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그 공연의 저자라고 할 수 있어요.

부산 공연 현장에서 그 '보이지 않는 협력자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나요?

부산은 서울보다 물리적 자원이 적다 보니 오히려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과정에서 쌓이는 신뢰와 관계가 부산 예술계를 실제로 지탱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관계가 지속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인정이요. 금전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한 일이 예술의 일부였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아봐 줄 때 사람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어요.

장현정 호밀밭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