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한 사람의 영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대 위의 예술가뿐 아니라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 공간과 기술을 제공하는 사람, 예술을 알리고 기록하는 사람, 이를 선택하고 평가하는 사람,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사람과 제도·기관, 그리고 작품을 만나는 관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참여자의 협력과 조정 속에서 하나의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미국의 예술사회학자 하워드 베커는 이러한 관계의 총체를 '예술계(Art Worlds)'라 부르며, 예술을 고립된 천재의 창조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관례와 자원을 공유하며 만들어내는 집합적 활동으로 바라보았다.
『문화예술』는 2026년 8월호부터 12월호까지 특별기획 「부산 예술계를 읽다」를 연재한다. 이번 기획은 하워드 베커의 『예술계』를 단순히 소개하거나 해설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의 문제의식을 하나의 렌즈로 삼아 부산의 음악·연극·무용을 비롯한 공연예술 현장을 들여다보고, 지역의 예술이 누구에 의해 생산되고 어떤 제도와 자원 속에서 유지되며, 어떠한 선택과 평가의 과정을 거쳐 관객과 만나는지를 살펴본다.
- ① 하워드 베커의 『예술계 Art Worlds』 장현정 · 호밀밭 출판사 대표
- ② 누가 예술을 만드는가 남영희 · (재)부산문화회관 공연예술본부장
- ③ 무엇이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가 원향미 · 부산문화재단 선임연구원
- ④ 누가 예술을 선택하는가 서상호 · 오픈스페이스 배 대표
- ⑤ 누가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이상헌 · 춤 비평가
- ⑥ 예술계는 어디로 가는가 오재환 · 前 부산문화재단 대표
'천재'는 예술에 대한 가장 진부하면서도 강력한 신화다. 세상과 불화하며 홀로 고독하게 고뇌하는 예술가,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예외적이고도 영웅적인 서사, 술과 광기에 둘러싸여 인생과 맞바꾼 작품 등이 이런 신화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이런 순진한 시선으로 예술과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국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S. Becker)가 1982년에 펴낸 이후 예술사회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예술계(Art Worlds)』의 영향도 적지 않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예술은 천재 예술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협력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집합적 실천(collective practice)"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고상하거나 현학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질문들에 매몰되지 않고 대신 사회학자답게 예술 작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집단적 실천'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예술이 신비로운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임을 드러냈다.
베커가 정의하는 '예술계(Art Worlds)'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조직이다. 여기에는 예술가라고 할 때 우선 떠올리는 창작자뿐만 아니라 재료 공급업자, 평론가, 기술자, 유통업자, 관객과 독자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베커에 따르면 예술은 이 모든 이해관계자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자 노동 분업의 현장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베커는 이토록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수많은 행위자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배경으로 '관습(convention)'이라는 핵심 개념을 제시한다.
공연 현장의 모습. 예술은 창작자 혼자가 아닌 수많은 협력자의 산물이다.
언뜻 관습이라고 하면 예술가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여기기 십상이지만 베커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도 전복한다. 오히려 관습은 공유된 규칙으로서 협력을 원활하게 하고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관습이 없다면 예술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관습을 깨는 예술가도 존재하지만 베커에게 이런 행위는 '낭만적 반항'이라기보다 '경제적 계산'의 결과다.
베커가 특히 날카롭게 파고든 것은 누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구분하는가였다. 베커에 따르면 어떤 것이 예술로 인정받거나 그렇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예술계 구성원들이 협상하고 투쟁하고 합의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특히 20세기 이후 현대 예술을 바라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인적으로 사회학을 공부했고 출판사를 20년 가까이 운영하다 보니 사회학자가 예술계에 대해 쓴 이 책의 여러 이야기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간혹 자기 글에서는 문장부호 하나, 토씨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고 요구하는 저자를 만날 때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자기 분야에서는 박사님이고 교수님일지 모르지만 책이라는 예술계에서는 초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베커는 자신의 연구를 '예술사회학'이 아닌 '직업사회학'으로 명명했다. 예술의 고상함과 신비로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한 가치 폄하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베커의 『예술계』를 읽고 나면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적어도 훨씬 입체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확실하다.
바야흐로 AI도 예술계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되고 있는 시대다. 오늘날 창작은 더욱 거대한 네트워크와 빠른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SNS의 독자 커뮤니티 등도 모두 새로운 예술계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에 대한 담론이나 비평 등을 읽다 보면 현학적이기만 하고 알맹이는 없는 글들이 차고 넘친다.
베커가 이 책을 통해 예술이 가진 아우라나 그 고유한 신비로움을 제거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예술은 여전히 신비롭고 고유하다. 베커는 예술가에게서 특별함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그 특별함이 어디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추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립된 천재성의 결과가 아니라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협력을 끌어내는 소통과 협업의 역량, 그리고 예술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루틴과 지속성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