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YCLOPAEDIA · Vol. XXI

여백에
대하여

책이 완성되는 시간

에세이

— p. 147 —

글 · 이서연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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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오래된 헌책방에서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책을 집어든 적이 있다. 연필 밑줄, 물음표, 한쪽 귀퉁이가 접힌 페이지. 나는 그 책을 처음 읽는 것인지, 아니면 그 누군가와 함께 다시 읽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여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I

여백을 읽다

책에는 두 개의 텍스트가 있다. 인쇄된 것과, 읽혀지는 것. 인쇄된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고, 읽혀지는 텍스트는 독자마다 다르다. 같은 문장을 백 명이 읽으면 백 개의 문장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여백은 무엇인가. 여백은 인쇄된 텍스트와 읽혀지는 텍스트 사이의 공간이다. 작가가 말하지 않은 것, 독자가 채워 넣는 것. 모든 독서는 사실 여백을 메우는 행위다.

책은 독자가 읽기 전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작가는 씨앗을 심고, 독자는 그것을 키운다. 같은 씨앗에서 전혀 다른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같은 책에서도 전혀 다른 의미가 자라난다.

나는 밑줄을 자주 긋는다. 좋은 문장 아래 가느다란 선을 그어두면, 그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문장이 살아있는 것 같다. 책장 어딘가에서 혼자 빛을 내는 것 같다.

II

흔적의 언어

헌책방에는 이전 독자들의 언어가 남아 있다. 연필 자국, 형광펜의 흔적, 여백에 적어둔 날짜와 이름. 누군가는 물음표를 남겼고, 누군가는 느낌표를 남겼다. 그 흔적들은 시간을 초월한 독서의 증거다.

누군가 밑줄 그은 문장을 다시 읽을 때, 우리는 그 독자와 같은 시간 위에 서게 된다. 그것은 이상한 친밀감이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같은 문장 앞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연결된다.

책에 쓰인 메모는 읽는 순간의 감정을 박제한다. 몇 년 후 같은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젊었던 나의 밑줄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변했고, 그 문장은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그 문장에서 다른 것을 본다.

여백은 비어 있지 않다. 우리가 채워야 할 공간이다. 책의 여백은 독자를 위해 남겨진 자리다. 거기에 무언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그 선택 자체가 이미 독서의 일부다.

III

책은 두 번 쓰인다

좋은 책은 한 번 읽어도 여러 번 읽은 것 같고, 여러 번 읽어도 새로운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고전이 고전인 이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두꺼워지는 책, 우리의 경험이 새 페이지를 더해주는 책.

읽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찾는 행위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낯선 언어로 쓰인 감정이, 어떤 날 밤 정확히 나의 말이 된다.

책의 첫 장을 여는 독자와 마지막 장을 닫는 독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이것이 독서의 비밀이다. 책이 우리를 읽는다.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책도 우리를 읽고 있다.

그래서 책은 두 번 쓰인다. 한 번은 작가에 의해, 한 번은 독자에 의해. 여백은 그 두 번째 글쓰기를 위한 공간이다. 이 페이지의 아직 비어있는 여백도, 당신의 것이다.

이서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책과 함께 자랐다. 헌책방을 순례하고, 도서관에서 잠이 들고, 연필이 닳도록 밑줄을 긋는 사람이다.

202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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